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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도 감히 가르칠 수 없다. - ◀ 원문보기 클릭 ▶
시는 영혼의 언어다.영혼의 언어는 가르칠 수 없다.詩를 가르치고 배운다는 것처럼 바보 같은 짓거리도 없다.시의 생명은 동질감이다.독자에게 동질감을 기대하지 마라.그것은 산에서 뱃사공을 찾는 것 보다 심히 어렵다.동질감을 형성하려고 혹은 돋보이려고 치장하지 마라.자연은 치장하지 않아도 동질감이 있고 돋보인다.詩가 곧 자연이고, 자연이 곧 詩다.문명에게 도살당한 자연은 제 홀로 아니 가고 시심도 앗아가 버렸다.자연이 붕괴됨으로서 詩도 죽었다.소쩍새를 보지도 듣지도 못한 사람은 소쩍새가 풍기는 시적인 것을 느끼지 못한다.그리 멀지 않은 시절푸른 하늘을 검게 물들이며 흙먼지를 풀풀풀 휘날리며 달려오는 소나기는 그야말로 장관이었다.치맛자락 날리며 달려온다.그 광경을 시적으로 표현한다 해도자연과 벗하지 않은 이들은 땅바닥에 빗방울이 튕기는 이미지밖에 창출해 내지 못한다.치맛자락 날리며 달려온다.단 한 줄의 싯귀로 자연이 연출한 장엄한 광경을 느끼는 사람은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할아버지의 할아버지할아버지와 아버지그리고나.그리고 없다.나를 비롯한 윗대는 배짱이 소리도 여치 소리도 그리고 갖가지 풀벌레 소리를 듣고 컷다.민들레도 채송화도 해바라기도 분꽃도 나팔꽃도 그리고 이름 모를 들꽃들도 보았다.밤하늘에 빤짝이는 별도 보았고 반딧불도 보았다.새소리와 함께 아침을 열었고 꽃과 함께 중천에 해를 올려놓았으며 풀벌레와 함께 달을 걸어 놓았다.자연과 함께 생활한 사람만이 詩다운 詩를 쓸 수 있고 타인의 詩에서 이미지를 감지할 수 있다.자연이 詩고 詩가 곧 자연이다.발에 걸리는 것이 시인이지만 시인다운 시인이 없다는 것은 자연과 더불어 생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자연을 배제하고 심적인 것을 표출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자연이 붕괴되지 않았을 때 詩는 짧았다.허나 지금은 어떤가?그 시절 오늘 날 같은 잡다한 산문시가 출현했다면 대접받지 못했을 것이다.詩는 죽었다.시인이라고 껍죽대는 이는 말할 것도 없고 詩를 가르친다는 사람을 보면 참으로 가소롭다.무엇 詩를 가르치고 배운단 말인가?소나무와 대나무는 배우지 않아도 소나무가 되고 대나무가 된다.시조도 이와 같다.시조의 스승은 상처에 의한 철학과 사상이다.시조도 자연이 파괴됨으로서 치명상을 입었으나 詩보다는 생존력이 상당하다.그것은 시조는 詩가 아니기 때문이다.시조의 돌팔이가 되고 싶지 않다면 그 누구에게도 배우려 하지 마라.자연보다 훌륭한 스승은 없다.자연과 그리고 자신에게 배워라.
객관적이지 않아도 좋습니다.
| ㆍ작성자 |
검정삿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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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ㆍ작성일 |
2008/11/07 (금) 16:07 |
| ㆍ분 류 |
기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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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1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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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도 감히 가르칠 수 없다.
시는 영혼의 언어다.
영혼의 언어는 가르칠 수 없다. 詩를 가르치고 배운다는 것처럼 바보 같은 짓거리도 없다.
시의 생명은 동질감이다. 독자에게 동질감을 기대하지 마라. 그것은 산에서 뱃사공을 찾는 것 보다 심히 어렵다. 동질감을 형성하려고 혹은 돋보이려고 치장하지 마라. 자연은 치장하지 않아도 동질감이 있고 돋보인다.
詩가 곧 자연이고, 자연이 곧 詩다. 문명에게 도살당한 자연은 제 홀로 아니 가고 시심도 앗아가 버렸다.
자연이 붕괴됨으로서 詩도 죽었다. 소쩍새를 보지도 듣지도 못한 사람은 소쩍새가 풍기는 시적인 것을 느끼지 못한다. 그리 멀지 않은 시절 푸른 하늘을 검게 물들이며 흙먼지를 풀풀풀 휘날리며 달려오는 소나기는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치맛자락 날리며 달려온다.
그 광경을 시적으로 표현한다 해도 자연과 벗하지 않은 이들은 땅바닥에 빗방울이 튕기는 이미지밖에 창출해 내지 못한다.
치맛자락 날리며 달려온다.
단 한 줄의 싯귀로 자연이 연출한 장엄한 광경을 느끼는 사람은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할아버지와 아버지 그리고 나. 그리고 없다.
나를 비롯한 윗대는 배짱이 소리도 여치 소리도 그리고 갖가지 풀벌레 소리를 듣고 컷다. 민들레도 채송화도 해바라기도 분꽃도 나팔꽃도 그리고 이름 모를 들꽃들도 보았다.
밤하늘에 빤짝이는 별도 보았고 반딧불도 보았다. 새소리와 함께 아침을 열었고 꽃과 함께 중천에 해를 올려놓았으며 풀벌레와 함께 달을 걸어 놓았다. 자연과 함께 생활한 사람만이 詩다운 詩를 쓸 수 있고 타인의 詩에서 이미지를 감지할 수 있다.
자연이 詩고 詩가 곧 자연이다. 발에 걸리는 것이 시인이지만 시인다운 시인이 없다는 것은 자연과 더불어 생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연을 배제하고 심적인 것을 표출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자연이 붕괴되지 않았을 때 詩는 짧았다. 허나 지금은 어떤가? 그 시절 오늘 날 같은 잡다한 산문시가 출현했다면 대접받지 못했을 것이다.
詩는 죽었다. 시인이라고 껍죽대는 이는 말할 것도 없고 詩를 가르친다는 사람을 보면 참으로 가소롭다. 무엇 詩를 가르치고 배운단 말인가? 소나무와 대나무는 배우지 않아도 소나무가 되고 대나무가 된다. 시조도 이와 같다. 시조의 스승은 상처에 의한 철학과 사상이다. 시조도 자연이 파괴됨으로서 치명상을 입었으나 詩보다는 생존력이 상당하다. 그것은 시조는 詩가 아니기 때문이다.
시조의 돌팔이가 되고 싶지 않다면 그 누구에게도 배우려 하지 마라. 자연보다 훌륭한 스승은 없다.
자연과 그리고 자신에게 배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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