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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춘문예를 말한다/신춘문예를 반대하는 이유/민병기 - ◀ 원문보기 클릭 ▶
신춘문예를 말한다□ 신춘문예제도는 개선되어야 한다/민병기(창원대 교수)에서 <신춘문예를 말한다>에서 발췌.
화려하고 공정한 등단 절차로 알려진 이 제도는 과연 완벽한가. 결코 그렇지 않다. 신문사가 주도하기 때문에 이에 따르는 결점 또한 크다. 신문사에는 여러 부서가 있다. 문화부는 그 중에 하나요, 문학은 문화부의 일부일 뿐이다. 그 비중도 또한 社內 사정이나 시대에 따라 상당히 가변적이다.한겨레나 국민일보처럼 신문사 중에는 이를 운영하지 않는 곳도 있다. 그것이 당연할지도 모른다. 전문 문예지나 출판사도 많은데, 굳이 비전문 기관인 신문사가 작가 배출의 공식 제도를 운영한다는 것은 모순이라는 주장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비전문 기관의 운영에 따르는 문제점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문제를 접근하는 데에 아주 유익한 자료가 있다. [신춘문예를 말한다](신춘문예 '89당선 작품집, 도서출판 예하, 1989)란 글이다.이 글은 좌담회 기록문인데, 참석자가 모두 문화부 기자들이란 점에서 주목하게 된다. 경향 ·서울 ·조선 ·중앙 ·한국의 신춘문예 담당 기자와 이 제도에 비판적인 글을 발표했던 한겨레 기자(조선희)가 참석했다. 김훈 기자를 비롯한 그들은 모두 실무 경험을 토대로 이 제도 전반에 대한 본질적인 문제를 솔직히 털어놓았다. 그들이 말하는 <신춘문예 운영상의 문제점>을 다음 4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심사의 불공정성 문제였다.공모의 생명인 공정성을 그들 스스로 부정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공정성은 전적으로 심사위원에 달린 것인데, 그들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참석자들의 주장 속에는 심사위원의 선정 과정과 자격 그리고 심사 과정에 대한 불신이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심사위원 선정 권한은 문화부 데스크에 있는데, 그것이 객관적 검증 없이 그의 임의로 행사되어, 근원적인 문제점이 발생한다는 것이 要旨였다.둘째, 짧은 기간에 심사를 종료해야 하는 促迫性의 문제였다.참석자들의 말에 의하면, 예심과 본심을 별개로 진행한다는 것이다. 예심 기간은 3-4일, 본심은 6일 정도 걸린다고 했다. 이 기간에 예심 위원들은 철야로 진행하는데, 시간은 부족하고 읽어야 할 양은 많아서, 대부분의 작품을 일부분만 보고 탈락시키고, 남는 작품(시 50여 편, 소설 30여 편)을 본심에 넘긴다는 것이다.셋째, 당선작에 공통된 유행성의 문제였다.참석자들은 소설이나 시 등의 장르에서 그것이 존재함을 시인했다. 이는 응모자들이 지나치게 당선에만 연연하여, 좋은 작품보다는 당선작을 만들려고 하는 지나친 의욕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었다. 그 결과 신춘문예 특유의 스타일이 암암리에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언론 제도가 신춘문예 양식과 스타일을 만들었다는 주장이다. 넷째, 당선자들의 작가적 단명성 문제였다.당선 이후에 왕성한 창작 활동을 하는 작가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가 더 많다. 신문사가 작가를 배출은 해놓고 키우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그래서 당선작이 최후의 작품이 되어버린 불행한 작가도 있다.이상의 문제점들은 그 운영의 실무를 맡고 있는 기자들의 경험적 발언이란 점과, 제도의 개선을 위한 그들의 솔직한 제언이란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또 이 문제들은 서로 필연적인 관계가 있어서, 문인은 물론이고 응모자들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내용이다. 문제점들 상호간의 필연성을 밝히는 데는 긴 설명이 필요 없다. 즉 촉박하게 진행되는 심사이니, 그 공정성이 보장되기 힘들고, 공정성이 불확실한 심사이니, 당선만을 노려 유행적 기교에 치중한 작품이 뽑힐 가능성이 높고, 그런 당선자는 단명하기 쉽다는 논리가 가능하다. 그렇다면 <촉박성> <불공정성> <유행성> <단명성>의 관계는 필연적이지 않는가.역대 당선작품들이 얼마나 많고 다양한데, 또 당선 작가 중에는 많은 업적을 쌓은 훌륭한 작가가 얼마든지 있는데, 근거도 없이 단순하게 논리화하는 것은 지나친 단정이라는 비판이 예상된다. 이 단순 논리는 문화부 기자들의 좌담 내용을 정리한 것일 뿐이니, 필자가 해명해야 할 몫은 아니다. 그러나 공감되는 부분이 많아 간접 인용했고, 그 논리의 연장선에서 객관적 사실을 토대로 필자의 견해 몇 가지를 덧붙인다. 첫째 심사의 불공정성에 관한 것이다. 담당 기자들의 말에 의하면, 예심보다 본심을 못 믿겠다는 것이다. 예심위원들이 작품의 일부만을 보고 감으로 뽑지만, 좋은 작품이 예심에서 탈락될 가능성은 거의 없으니, 그들은 믿을 수 있으나, 본심은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이유로 심사위원의 고령을 들었다. 젊은 세대의 시를 심사하기엔 원로 문인은 적합하지 않으니, 본심 위원의 연령을 낮추어 선정하든지, 아니면 차라리 본심을 없애든지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담당 기자들이 폐지론까지 내세우며 본심에 대한 강한 불신감을 표시하는 구체적인 이유가 좌담에서 확실히 드러나지 않았다.이에 대하여 필자가 조사한 자료 한 가지를 제시하고 싶다. 그 하나가 본심 위원들이 반복(연속)과 중복(겹치기) 심사를 하는 점이다. 특정인에게 계속 심사를 의뢰한 대표적인 신문사가 조선일보이다. 이 신문사는 박두진·조병화에게 연속 맡겼다. 그들은 73-90년 사이 17년 계속 함께 심사를 했다. 공모의 생명이 심사위원의 비공개인데, 이렇게 같은 사람에게 연속 심사를 맡긴다면, 비공개의 의미는 없어진다.또 심사위원의 겹치기 심사도 큰 문제였다. 시 분야에서 중복 심사를 가장 많이 했던 시인은 박남수였다. 그는 69년부터 72년까지 4년 동안 계속 4번씩 중복으로 중앙지의 심사를 했다.(신춘문예 당선 시 목록 참조) 당시 심사를 맡을 만한 원로 문인의 부족과 촉박한 일정 때문에 중복은 불가피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인적 사정이 풍부해진 90년대에도 중복은 그대로 답습되었다. 김주연은 94년에 조선 ·동아 ·중앙 ·대구매일 등 4번 중복 심사를 했고, 유종호는 97년에 경향·서울·세계를, 같은 해 신경림은 경향 ·세계 ·한국의 심사를 각각 맡았다. 그들 이외도 3번 이상 중복으로 심사한 문인은 적지 않다. 심사 기간이 다르고 시간이 충분하다면, 중복 심사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러나 모든 신문사가 거의 같은 시기에 촉박한 일정으로 심사를 진행한다. 그 기간은 예심과 본심을 합해 10여일 정도, 그것도 예심이 끝난 뒤에 본심이 있다. 예심은 시간이 부족하여 철야를 한다. 그래도 작품을 다 읽지 못하여, 그 일부분만 읽고 작품 심사를 하는 촉박한 상황에서, 한 사람이 4곳의 심사를 겹치기로 맡는다는 사실, 또 4 신문사가 한 사람에게 중복으로 심사를 맡긴다는 사실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여기서 우리는 신문사 담당자와 심사위원 양편 모두에 대해, 과연 그들이 심사를 공정·정확하게 할 의지를 가지고 있었는가를 묻고 싶다. 동일한 기준으로 모든 작품을 심사하는 것이 원칙이라면, 예심제는 편법이요, 예심에서 응모작의 일부분만 읽고 추리는 것도 편법이요, 편법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촉박한 일정인데, 대외적 책임을 져야할 심사위원들이 여러 곳에 중복으로 심사하는 것은 더욱 편법이다.편법 심사의 모순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심사평을 보면, 좀 차이가 있지만 많아야 50여 편의 시가 본심에 오른다 하니, 수 천 편의 응모작 중에 약 99%가 예심에서 탈락된다. 본심에서 검토되는 것은 응모작의 1% 미만에 불과하다. 심사를 대표하는 본심 위원은, 비록 예심을 거쳤다고는 하나, 총 응모작의 1% 정도를 심사하고, 당선작과 낙선작에 대한 모든 책임을 져야 한다.심사는 예심 위원들이 거의 다하고, 책임은 본심 위원들이 지는 셈이다. 얼마나 큰 모순인가. 편법 심사의 모순이 촉박한 일정에서 비롯된다면, 마감일을 당기고 심사 기간을 늘리면 된다. 그런데 6-70 년대보다 8-90 년대의 일정이 더 촉박해졌다. 응모작은 갈수록 많아지고, 응모 마감 일은 오히려 더 연장되어, 촉박한 상황이 더 악화되었다. 그렇게 악화된 이유는 무엇인가. 그 원인을 신문사의 속성에서 찾을 수 있다. 일간 신문이란 그날 발생한 사건을 그날 보도하는 것이 생명이다. 따라서 촉박한 일처리는 신문사의 생리이다. 저널리즘과 문학의 결합으로 태어난 것이 신춘문예 제도이다. 이 제도가 저널리즘 주도로 운영되는 과정에서 문학성의 손실이 크다. 그 희생을 막기 위해 촉박한 졸속 운영은 반드시 시정되든지 아니면 폐지되어야 한다.
신춘문예를 반대하는 이유□ 에서 부분 발췌.
신춘문예 당선은 화려하고 권위가 있는 등단 절차로 공인된 지 오래다. 이 관문을 통과하기 위해 매년 많은 문학 지망생들이 각 신문사에 응모한다. 이 제도를 운영하는 신문사가 서울에만 여덟 곳이며, 대구, 부산, 광주, 경남 등의 지방지까지 합치면 열 곳이 훨씬 넘는다. 98년도 응모 기간 중 한 신문사의 시 분야에만 1만 통이 넘게 접수되었다고 하니, 이 제도에 대한 예비 문인들의 높은 관심도를 짐작할 수 있다.이렇게 비상한 관심이 쏠리고 있는 이 제도는 한국 문학의 발전에 진정으로 기여하고 있는가. 비전문 기관인 신문사가 운영하는 데 따른 문제점은 없는가. 이에 대한 진지한 검토가 필요하다. 매년 많은 석·박사 학위 논문이 발표되었지만, 그 중에 이 제도의 운영과 영향에 대한 연구는 거의 없다. 신춘문예 당선 소설의 어휘를 분석한 석사 논문 두 편이 고작이다.평론도 사정은 비슷하여, 그 해 당선된 시의 경향을 논평한 것이나 당선자와 담당 기자들의 좌담회 정도가 전부인 실정이다. 연구의 필요성이 높은 데 비해, 이에 대해 거의 연구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우리의 문학 연구가 실제 작품의 생산이나 유통에 대해 무관심하다는 것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즉 연구의 성과가 실제 창작자나 독자에게 별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는 대학에서 이루어지는 문학 연구가 지극히 자족적인 데 있다. 자족적 연구란 오직 연구를 위한 연구로, 그 사회적 가치가 전혀 없는 연구를 말한다. 이런 연구물은 독자가 전혀 없다. 사회 발전에 아무런 기여를 못 하는 연구로, 사회에 대해 <닫힌 연구>를 의미한다. 이제 우리의 문학연구도 <닫힌 연구>에서 <연린 연구>로 연구의 패러다임이 변해야 한다. 사회를 향해 <열린 연구>란 명작의 생산과 유통에 기여하는 연구를 말한다. 작가가 좋은 작품을 쓰고, 이를 독자가 읽도록 도와주는 연구이다. 이로써 문학을 사랑하고 문학이 사랑 받는 사회가 만들어 질 수 있으니, 이는 참으로 우리 사회에 필요한 연구이다. <열린 연구>란 쉽게 말해 일반 독자들을 위한 연구이다. 예를 든다면, 독자들이 책을 선정할 때 자신의 취향에 맞는 좋은 작품을 고르는 데 유익한 정보를 제공하는 기능을 하는 연구이다. 이러한 연구가 잘 이루어지면, 책 광고의 비리는 자연 사라질 것이다. 한국은 지나친 책 광고와 그에 따르는 사회적 손실이 크다. 내용보다 투자한 광고의 액수에 비례하여 책이 팔린다면, 그 막대한 광고비는 모두 독자의 몫이다. 또 광고를 하지 않는 양서보다 광고를 많이 하는 악서가 오히려 잘 팔린다면, 이는 큰 모순이다. 이런 모순으로 피해를 보는 것은 독자층이다. 출판사의 상술에 독자도 문학도 지배를 받게 된다.평론가들도 출판사와 손을 잡고 판매 전략으로 그들의 지식을 은밀하게 제공하게 된다. 각종 문학상도 판매 전략의 상표로 활용되고, 서평이나 문학 관련 기사문의 내용도 <위장된 광고>의 성격을 띠게 된다. 이러한 문화의 비리를 바로잡기 위해 <열린 연구>가 참으로 절실하게 요청된다.과대한 책 광고의 비리를 없애기 위해 신뢰성이 높은 독서 안내서가 필요하다. 독자층이 신뢰할 만한 객관적인 독서 정보를 담은 책이 계속 발간된다면, 독자들을 엉터리 광고에 현혹되어 악서(惡書)를 선택하지 않고, 그 정보에 따라 양서를 선택할 것이다. 그런 연구가 바로 <열린 연구>이다. 그러면 광고에 따르는 비리는 자연 사라질 것이다.문제는 독자들이 믿을 만한 독서 정보 파일을 누가 만드느냐이다. 그것을 출판사가 맡으면, 공정성을 결코 기대할 수 없다. 객관적으로 공정하게 만들 곳은 대학뿐이다. 대학에서 독자를 위한 명작과 신간 안내서가 매년 발간된다면, 책에 대한 과대 광고의 비리는 사라질 것이다. 독서 정보 파일을 한 대학이 맡아 하는 것은 힘들고, 여러 대학이 맡는 것이 바람직하다. 대학별로 영역과 지역을 분담하여 만든다면, 그 효과가 더 클 것이다. 그 내용을 공개하는 발표 창구로 대학에서 운영하는 사이버 잡지나 대학의 학과 홈페이지가 이상적이다. 예를 든다면, 경상대 국문학과에서 개설한 <지리산 글방>이나 창원대 국문학과에서 개설한 홈페이지나 황국명 교수의 홈페이지 같은 사이버 공간이 바람직하다.<열린 연구>의 하나로 신춘문예 제도의 의미와 기능을 검토하는 문제도 빼놓을 수 없다. 매년 당선되는 작품들이 독자들에게 끼치는 영향도 연구 대상이다. 시의 경우, 당선작 대부분이 독자들에게 외면 당하고 있다. 많은 역대 당선작 중에 독자들에게 애송되는 시가 없다. 이 사실은 신춘문예 제도가 독자 반응이 좋지 않은 작품과 작가를 양산한다는 것은 의미한다. 신춘문예 당선은 문학적 사건은 될 수 있어도, 문학성 그 자체일 수는 없다. 그것이 동일시 된다면, 문학성은 무의미해지고, 문학성에 대한 독자들의 공신력은 사라질 것이며, 결국 문학은 생명을 잃게 된다. 이는 신춘 제도가 문학의 생명력을 높이기 보다 오히려 그 반대로 작용했다는 것을 시사한다. 매년 신춘문예로 많은 스타들이 탄생한다. 그들 중에는 지금도 찬란한 빛을 발하는 시의 성좌가 있는가 하면, 곧 어둠 속으로 사라진 유성이 훨씬 많다. 그들의 차이는 무엇일까. 양자의 작품들을 분석하여 그 성격과 특징을 언론의 속성과 관련시켜 밝히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그것이 바로 문학과 저널리즘의 관계를 밝히는 것이요, 시의 생명력을 회복하기 위한 기초 연구가 되기 때문이다.화려하고 공정한 등단 절차로 알려진 이 제도는 과연 완벽한가. 결코 그렇지 않다.
객관적이지 않아도 좋습니다.
| ㆍ작성자 |
검정삿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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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ㆍ작성일 |
2010/11/04 (목) 05:43 |
| ㆍ분 류 |
기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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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1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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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춘문예를 말한다/신춘문예를 반대하는 이유/민병기
신춘문예를 말한다
□ 신춘문예제도는 개선되어야 한다/민병기(창원대 교수)에서 <신춘문예를 말한다>에서 발췌.
화려하고 공정한 등단 절차로 알려진 이 제도는 과연 완벽한가. 결코 그렇지 않다. 신문사가 주도하기 때문에 이에 따르는 결점 또한 크다. 신문사에는 여러 부서가 있다. 문화부는 그 중에 하나요, 문학은 문화부의 일부일 뿐이다. 그 비중도 또한 社內 사정이나 시대에 따라 상당히 가변적이다.
한겨레나 국민일보처럼 신문사 중에는 이를 운영하지 않는 곳도 있다. 그것이 당연할지도 모른다. 전문 문예지나 출판사도 많은데, 굳이 비전문 기관인 신문사가 작가 배출의 공식 제도를 운영한다는 것은 모순이라는 주장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비전문 기관의 운영에 따르는 문제점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문제를 접근하는 데에 아주 유익한 자료가 있다. [신춘문예를 말한다](신춘문예 '89당선 작품집, 도서출판 예하, 1989)란 글이다.
이 글은 좌담회 기록문인데, 참석자가 모두 문화부 기자들이란 점에서 주목하게 된다. 경향 ·서울 ·조선 ·중앙 ·한국의 신춘문예 담당 기자와 이 제도에 비판적인 글을 발표했던 한겨레 기자(조선희)가 참석했다. 김훈 기자를 비롯한 그들은 모두 실무 경험을 토대로 이 제도 전반에 대한 본질적인 문제를 솔직히 털어놓았다. 그들이 말하는 <신춘문예 운영상의 문제점>을 다음 4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심사의 불공정성 문제였다.
공모의 생명인 공정성을 그들 스스로 부정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공정성은 전적으로 심사위원에 달린 것인데, 그들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참석자들의 주장 속에는 심사위원의 선정 과정과 자격 그리고 심사 과정에 대한 불신이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심사위원 선정 권한은 문화부 데스크에 있는데, 그것이 객관적 검증 없이 그의 임의로 행사되어, 근원적인 문제점이 발생한다는 것이 要旨였다.
둘째, 짧은 기간에 심사를 종료해야 하는 促迫性의 문제였다.
참석자들의 말에 의하면, 예심과 본심을 별개로 진행한다는 것이다. 예심 기간은 3-4일, 본심은 6일 정도 걸린다고 했다. 이 기간에 예심 위원들은 철야로 진행하는데, 시간은 부족하고 읽어야 할 양은 많아서, 대부분의 작품을 일부분만 보고 탈락시키고, 남는 작품(시 50여 편, 소설 30여 편)을 본심에 넘긴다는 것이다.
셋째, 당선작에 공통된 유행성의 문제였다.
참석자들은 소설이나 시 등의 장르에서 그것이 존재함을 시인했다. 이는 응모자들이 지나치게 당선에만 연연하여, 좋은 작품보다는 당선작을 만들려고 하는 지나친 의욕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었다. 그 결과 신춘문예 특유의 스타일이 암암리에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언론 제도가 신춘문예 양식과 스타일을 만들었다는 주장이다.
넷째, 당선자들의 작가적 단명성 문제였다.
당선 이후에 왕성한 창작 활동을 하는 작가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가 더 많다. 신문사가 작가를 배출은 해놓고 키우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그래서 당선작이 최후의 작품이 되어버린 불행한 작가도 있다.
이상의 문제점들은 그 운영의 실무를 맡고 있는 기자들의 경험적 발언이란 점과, 제도의 개선을 위한 그들의 솔직한 제언이란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또 이 문제들은 서로 필연적인 관계가 있어서, 문인은 물론이고 응모자들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내용이다. 문제점들 상호간의 필연성을 밝히는 데는 긴 설명이 필요 없다. 즉 촉박하게 진행되는 심사이니, 그 공정성이 보장되기 힘들고, 공정성이 불확실한 심사이니, 당선만을 노려 유행적 기교에 치중한 작품이 뽑힐 가능성이 높고, 그런 당선자는 단명하기 쉽다는 논리가 가능하다. 그렇다면 <촉박성> <불공정성> <유행성> <단명성>의 관계는 필연적이지 않는가.
역대 당선작품들이 얼마나 많고 다양한데, 또 당선 작가 중에는 많은 업적을 쌓은 훌륭한 작가가 얼마든지 있는데, 근거도 없이 단순하게 논리화하는 것은 지나친 단정이라는 비판이 예상된다. 이 단순 논리는 문화부 기자들의 좌담 내용을 정리한 것일 뿐이니, 필자가 해명해야 할 몫은 아니다. 그러나 공감되는 부분이 많아 간접 인용했고, 그 논리의 연장선에서 객관적 사실을 토대로 필자의 견해 몇 가지를 덧붙인다.
첫째 심사의 불공정성에 관한 것이다. 담당 기자들의 말에 의하면, 예심보다 본심을 못 믿겠다는 것이다. 예심위원들이 작품의 일부만을 보고 감으로 뽑지만, 좋은 작품이 예심에서 탈락될 가능성은 거의 없으니, 그들은 믿을 수 있으나, 본심은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이유로 심사위원의 고령을 들었다. 젊은 세대의 시를 심사하기엔 원로 문인은 적합하지 않으니, 본심 위원의 연령을 낮추어 선정하든지, 아니면 차라리 본심을 없애든지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담당 기자들이 폐지론까지 내세우며 본심에 대한 강한 불신감을 표시하는 구체적인 이유가 좌담에서 확실히 드러나지 않았다.
이에 대하여 필자가 조사한 자료 한 가지를 제시하고 싶다. 그 하나가 본심 위원들이 반복(연속)과 중복(겹치기) 심사를 하는 점이다. 특정인에게 계속 심사를 의뢰한 대표적인 신문사가 조선일보이다. 이 신문사는 박두진·조병화에게 연속 맡겼다. 그들은 73-90년 사이 17년 계속 함께 심사를 했다. 공모의 생명이 심사위원의 비공개인데, 이렇게 같은 사람에게 연속 심사를 맡긴다면, 비공개의 의미는 없어진다.
또 심사위원의 겹치기 심사도 큰 문제였다. 시 분야에서 중복 심사를 가장 많이 했던 시인은 박남수였다. 그는 69년부터 72년까지 4년 동안 계속 4번씩 중복으로 중앙지의 심사를 했다.(신춘문예 당선 시 목록 참조) 당시 심사를 맡을 만한 원로 문인의 부족과 촉박한 일정 때문에 중복은 불가피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인적 사정이 풍부해진 90년대에도 중복은 그대로 답습되었다. 김주연은 94년에 조선 ·동아 ·중앙 ·대구매일 등 4번 중복 심사를 했고, 유종호는 97년에 경향·서울·세계를, 같은 해 신경림은 경향 ·세계 ·한국의 심사를 각각 맡았다. 그들 이외도 3번 이상 중복으로 심사한 문인은 적지 않다.
심사 기간이 다르고 시간이 충분하다면, 중복 심사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러나 모든 신문사가 거의 같은 시기에 촉박한 일정으로 심사를 진행한다. 그 기간은 예심과 본심을 합해 10여일 정도, 그것도 예심이 끝난 뒤에 본심이 있다. 예심은 시간이 부족하여 철야를 한다. 그래도 작품을 다 읽지 못하여, 그 일부분만 읽고 작품 심사를 하는 촉박한 상황에서, 한 사람이 4곳의 심사를 겹치기로 맡는다는 사실, 또 4 신문사가 한 사람에게 중복으로 심사를 맡긴다는 사실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
여기서 우리는 신문사 담당자와 심사위원 양편 모두에 대해, 과연 그들이 심사를 공정·정확하게 할 의지를 가지고 있었는가를 묻고 싶다. 동일한 기준으로 모든 작품을 심사하는 것이 원칙이라면, 예심제는 편법이요, 예심에서 응모작의 일부분만 읽고 추리는 것도 편법이요, 편법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촉박한 일정인데, 대외적 책임을 져야할 심사위원들이 여러 곳에 중복으로 심사하는 것은 더욱 편법이다.
편법 심사의 모순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심사평을 보면, 좀 차이가 있지만 많아야 50여 편의 시가 본심에 오른다 하니, 수 천 편의 응모작 중에 약 99%가 예심에서 탈락된다. 본심에서 검토되는 것은 응모작의 1% 미만에 불과하다. 심사를 대표하는 본심 위원은, 비록 예심을 거쳤다고는 하나, 총 응모작의 1% 정도를 심사하고, 당선작과 낙선작에 대한 모든 책임을 져야 한다.
심사는 예심 위원들이 거의 다하고, 책임은 본심 위원들이 지는 셈이다. 얼마나 큰 모순인가. 편법 심사의 모순이 촉박한 일정에서 비롯된다면, 마감일을 당기고 심사 기간을 늘리면 된다. 그런데 6-70 년대보다 8-90 년대의 일정이 더 촉박해졌다. 응모작은 갈수록 많아지고, 응모 마감 일은 오히려 더 연장되어, 촉박한 상황이 더 악화되었다. 그렇게 악화된 이유는 무엇인가. 그 원인을 신문사의 속성에서 찾을 수 있다. 일간 신문이란 그날 발생한 사건을 그날 보도하는 것이 생명이다. 따라서 촉박한 일처리는 신문사의 생리이다. 저널리즘과 문학의 결합으로 태어난 것이 신춘문예 제도이다. 이 제도가 저널리즘 주도로 운영되는 과정에서 문학성의 손실이 크다. 그 희생을 막기 위해 촉박한 졸속 운영은 반드시 시정되든지 아니면 폐지되어야 한다.
신춘문예를 반대하는 이유
□ <신춘문예를 반대하는 이유>에서 부분 발췌.
신춘문예 당선은 화려하고 권위가 있는 등단 절차로 공인된 지 오래다. 이 관문을 통과하기 위해 매년 많은 문학 지망생들이 각 신문사에 응모한다. 이 제도를 운영하는 신문사가 서울에만 여덟 곳이며, 대구, 부산, 광주, 경남 등의 지방지까지 합치면 열 곳이 훨씬 넘는다. 98년도 응모 기간 중 한 신문사의 시 분야에만 1만 통이 넘게 접수되었다고 하니, 이 제도에 대한 예비 문인들의 높은 관심도를 짐작할 수 있다.
이렇게 비상한 관심이 쏠리고 있는 이 제도는 한국 문학의 발전에 진정으로 기여하고 있는가. 비전문 기관인 신문사가 운영하는 데 따른 문제점은 없는가. 이에 대한 진지한 검토가 필요하다. 매년 많은 석·박사 학위 논문이 발표되었지만, 그 중에 이 제도의 운영과 영향에 대한 연구는 거의 없다. 신춘문예 당선 소설의 어휘를 분석한 석사 논문 두 편이 고작이다.
평론도 사정은 비슷하여, 그 해 당선된 시의 경향을 논평한 것이나 당선자와 담당 기자들의 좌담회 정도가 전부인 실정이다. 연구의 필요성이 높은 데 비해, 이에 대해 거의 연구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우리의 문학 연구가 실제 작품의 생산이나 유통에 대해 무관심하다는 것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즉 연구의 성과가 실제 창작자나 독자에게 별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는 대학에서 이루어지는 문학 연구가 지극히 자족적인 데 있다. 자족적 연구란 오직 연구를 위한 연구로, 그 사회적 가치가 전혀 없는 연구를 말한다.
이런 연구물은 독자가 전혀 없다. 사회 발전에 아무런 기여를 못 하는 연구로, 사회에 대해 <닫힌 연구>를 의미한다. 이제 우리의 문학연구도 <닫힌 연구>에서 <연린 연구>로 연구의 패러다임이 변해야 한다. 사회를 향해 <열린 연구>란 명작의 생산과 유통에 기여하는 연구를 말한다. 작가가 좋은 작품을 쓰고, 이를 독자가 읽도록 도와주는 연구이다. 이로써 문학을 사랑하고 문학이 사랑 받는 사회가 만들어 질 수 있으니, 이는 참으로 우리 사회에 필요한 연구이다.
<열린 연구>란 쉽게 말해 일반 독자들을 위한 연구이다. 예를 든다면, 독자들이 책을 선정할 때 자신의 취향에 맞는 좋은 작품을 고르는 데 유익한 정보를 제공하는 기능을 하는 연구이다. 이러한 연구가 잘 이루어지면, 책 광고의 비리는 자연 사라질 것이다.
한국은 지나친 책 광고와 그에 따르는 사회적 손실이 크다. 내용보다 투자한 광고의 액수에 비례하여 책이 팔린다면, 그 막대한 광고비는 모두 독자의 몫이다. 또 광고를 하지 않는 양서보다 광고를 많이 하는 악서가 오히려 잘 팔린다면, 이는 큰 모순이다. 이런 모순으로 피해를 보는 것은 독자층이다. 출판사의 상술에 독자도 문학도 지배를 받게 된다.
평론가들도 출판사와 손을 잡고 판매 전략으로 그들의 지식을 은밀하게 제공하게 된다. 각종 문학상도 판매 전략의 상표로 활용되고, 서평이나 문학 관련 기사문의 내용도 <위장된 광고>의 성격을 띠게 된다. 이러한 문화의 비리를 바로잡기 위해 <열린 연구>가 참으로 절실하게 요청된다.
과대한 책 광고의 비리를 없애기 위해 신뢰성이 높은 독서 안내서가 필요하다. 독자층이 신뢰할 만한 객관적인 독서 정보를 담은 책이 계속 발간된다면, 독자들을 엉터리 광고에 현혹되어 악서(惡書)를 선택하지 않고, 그 정보에 따라 양서를 선택할 것이다. 그런 연구가 바로 <열린 연구>이다. 그러면 광고에 따르는 비리는 자연 사라질 것이다.
문제는 독자들이 믿을 만한 독서 정보 파일을 누가 만드느냐이다. 그것을 출판사가 맡으면, 공정성을 결코 기대할 수 없다. 객관적으로 공정하게 만들 곳은 대학뿐이다. 대학에서 독자를 위한 명작과 신간 안내서가 매년 발간된다면, 책에 대한 과대 광고의 비리는 사라질 것이다.
독서 정보 파일을 한 대학이 맡아 하는 것은 힘들고, 여러 대학이 맡는 것이 바람직하다. 대학별로 영역과 지역을 분담하여 만든다면, 그 효과가 더 클 것이다. 그 내용을 공개하는 발표 창구로 대학에서 운영하는 사이버 잡지나 대학의 학과 홈페이지가 이상적이다. 예를 든다면, 경상대 국문학과에서 개설한 <지리산 글방>이나 창원대 국문학과에서 개설한 홈페이지나 황국명 교수의 홈페이지 같은 사이버 공간이 바람직하다.
<열린 연구>의 하나로 신춘문예 제도의 의미와 기능을 검토하는 문제도 빼놓을 수 없다. 매년 당선되는 작품들이 독자들에게 끼치는 영향도 연구 대상이다. 시의 경우, 당선작 대부분이 독자들에게 외면 당하고 있다. 많은 역대 당선작 중에 독자들에게 애송되는 시가 없다. 이 사실은 신춘문예 제도가 독자 반응이 좋지 않은 작품과 작가를 양산한다는 것은 의미한다.
신춘문예 당선은 문학적 사건은 될 수 있어도, 문학성 그 자체일 수는 없다. 그것이 동일시 된다면, 문학성은 무의미해지고, 문학성에 대한 독자들의 공신력은 사라질 것이며, 결국 문학은 생명을 잃게 된다. 이는 신춘 제도가 문학의 생명력을 높이기 보다 오히려 그 반대로 작용했다는 것을 시사한다.
매년 신춘문예로 많은 스타들이 탄생한다. 그들 중에는 지금도 찬란한 빛을 발하는 시의 성좌가 있는가 하면, 곧 어둠 속으로 사라진 유성이 훨씬 많다. 그들의 차이는 무엇일까. 양자의 작품들을 분석하여 그 성격과 특징을 언론의 속성과 관련시켜 밝히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그것이 바로 문학과 저널리즘의 관계를 밝히는 것이요, 시의 생명력을 회복하기 위한 기초 연구가 되기 때문이다.
화려하고 공정한 등단 절차로 알려진 이 제도는 과연 완벽한가. 결코 그렇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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